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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 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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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시 도루는 1850년 일본 에도에서 태어나, 영어 교사, 요코하마 세관장, 변호사,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무쓰 무네미쓰의 추천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세관장 재직 시 빅토리아 여왕을 '여왕'으로 칭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임했다. 이후 영국에서 법정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 후에는 사법성 부속 대언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3대 사건 건백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고, 중의원 의장과 체신대신을 역임하며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펼쳤다. 1901년 도쿄시의회 의장으로 재직 중 암살당했으며, 금권 정치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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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 도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호시 도루
한자 표기星 亨
로마자 표기Hoshi Tōru
출생1850년 5월 19일
출생지에도 막부 무사시국 에도 쓰키지 오다와라마치 (현재의 도쿄도 주오구 쓰키지)
사망1901년 6월 21일
사망지도쿄부 도쿄시
국적일본
직업정치인, 각료
학력
출신 학교다카시마 학교, 헵번塾 (현재의 메이지가쿠인 대학), 미들 템플
경력
전직관료, 변호사
소속 정당(자유당 →)
(헌정당 →)
입헌정우회
작위/훈장종6위
주요 직책제10대 체신대신
제2대 중의원 의장
체신대신 임기1900년 10월 19일 ~ 1900년 12월 21일
중의원 의장 임기1892년 5월 3일 ~ 1893년 12월 13일

2. 생애

에도 쓰키지에서 태어난 호시 도루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호시'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요코하마에서 영어를 배우며 영어 교사가 되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무쓰 무네미쓰의 추천으로 관직에 진출, 대장성과 요코하마 세관에서 일했다.

세관장 재직 중 빅토리아 여왕을 '여왕'으로 번역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와 갈등을 빚고 사임했다(여왕 사건).[13] 이후 영국으로 유학, 일본인 최초로 법정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사법성에서 대언인으로 활동했다.

번벌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호시는 3대 사건 건백 운동에 참여했다가 보안 조례 위반 등으로 탄압받았다.[2]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등 해외 체류 후 귀국하여 입헌자유당에 참여, 1892년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다.[18] 그러나 소마 사건 관련 뇌물 수수 의혹으로 불신임을 받고 의원직에서 제명되었다가 다음 선거에서 재선되었다.[3]

대한제국 법무고문, 미국 주재 공사 등을 역임하고, 제1차 오쿠마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입각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 제4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대신으로 첫 입각, 입헌정우회 창당에 참여했다.[7][8]

호시는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추진하고 지방의 이익을 확대하여 정우회의 지지 기반을 넓히려 했다. 이 과정에서 뇌물 수수 의혹을 받았지만(본인은 부정), 현대 일본 금권정치의 원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오사카 사건 이후 깡패들을 당에 입당시켜 우파의 입지를 강화하려 한 점은 비판받았다.

도쿄 시의회 의장 재직 중, 1901년 6월 도쿄시청에서 이바 소타로에게 암살당했다.[5] 그의 장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기증되어 '호시 문고'로 보관되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호시는 에도 쓰키지에서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9] 하지만 부친은 씀씀이가 헤픈데다 도산까지 당하자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 모친은 우라가의 의사와 재혼했고, 호시는 그녀의 성을 따라 호시로 성을 고쳤다.[9]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요코하마에서 영어를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무쓰 무네미쓰의 추천으로 요코하마현의 2등 역관으로 고용되었고, 대장성 조세권두와 요코하마 세관장을 차례로 지냈다.[11]

세관장 시절, 영국의 군주였던 빅토리아를 '여왕'으로 번역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해리 파크스 주일 영국 공사의 항의를 받고 세관장에서 물러났다(여왕 사건).[13]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은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1] 귀국 후에는 사법성 부속 대언인이 되었다.[5]

호시 도루의 출생, 가족 관계, 학력 및 초기 경력은 다음과 같다.

구분내용
출생1850년 5월, 에도 츠키지 오다와라 정 (현 도쿄도 주오구 쓰키지)에서 미장이(쓰쿠다야 도쿠베)의 장남으로 출생 (유아명 하마키치)[9]
가족
학력
초기 경력


2. 2.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경력

메이지 유신 이후, 호시 도루는 무쓰 무네미쓰의 추천으로 요코하마현의 2등 역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2] 이후 대장성 조세권두와 요코하마 세관장을 역임했다. 세관장 시절, 영국의 군주였던 빅토리아를 '여왕'으로 칭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의 항의를 받고 세관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여왕 사건).[13]

이후 호시는 법률 연구를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일본인 최초로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11][14] 귀국 후에는 사법성 부속 대언인(代言人, 변호사)으로 활동했다.[5]

당시 일본의 번벌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호시는 1887년 3대 사건 건백 운동에 참가했다가 보안 조례 위반으로 도쿄에서 추방되고, 출판 조례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2] 1888년에는 미국캐나다에서 약 1년간 체류했으며, 이후 영국과 독일에서 체류한 뒤 1890년에 귀국했다.[17]

1890년 결성된 입헌자유당에 참가했고, 1892년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치기현 제1구에서 당선되어 제2대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소마 사건 관련 뇌물 수수 의혹으로 의장 불신임안이 가결되었고, 호시는 이를 부정하며 의장직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 중의원에서 제명되었다.[3] 이후 다음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무쓰 무네미쓰와의 인연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법무고문과 미국 주재 공사를 역임했다.[20] 1898년 헌정당이 집권한 제1차 오쿠마 내각에서는 당초 외무대신으로 입각할 예정이었으나 오쿠마 시게노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무산되었고, 호시는 이를 비난하며 헌정당의 분열을 꾀하기도 했다. 제4차 이토 내각에서는 체신대신으로 입각했으며, 1900년 이토가 창당한 입헌정우회에 참여했다.[5][7][8]

호시는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추진하여 지방의 이익 확대를 유도하고, 이를 통해 정우회의 지지 기반을 넓히고자 했다. 그는 뇌물 수수 혐의를 받았지만(본인은 부정), 이는 현대 일본에서 금권정치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또한 오사카 사건 이후 깡패들을 당에 입당시켜 우파의 입지를 강화하려 한 점도 비판받았다.

이후 도쿄시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1901년 6월 도쿄시청 참사회의실에서 비밀회의를 끝낸 뒤 시장 등과 간담을 하던 중 이바 소타로에게 암살당했다.[5]

2. 3. 정치 활동

호시 도루는 메이지 유신 이후 무쓰 무네미쓰의 추천으로 요코하마현의 2등역관으로 고용되었고, 대장성 조세권두와 요코하마세관장을 역임했다. 세관장 시절 빅토리아를 '여왕'으로 호칭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의 항의를 받고 사임했다(여왕 사건).[2]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일본인 최초로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귀국 후에는 사법성 부속 대언인(代言人)으로 활동했다.[5]

당시 일본의 번벌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호시는 3대 사건 건백 운동에 참가했다가 보안조례 위반으로 도쿄에서 추방, 출판조례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2] 1888년에는 미국캐나다에서 약 1년간 체류, 이후 영국과 독일에서 체류한 뒤 1890년 귀국했다.

1882년 자유당에 입당, 『자유신문』 경영에 참여했다.[5] 1884년에는 신문 『자유등』을 창간, 정부 비판 논객이 되었으나 관리를 모욕한 죄 등으로 2번 투옥되었다. 1887년 재야 각 당의 대동단결운동을 추진했다.[5][6]

1890년 결성된 입헌자유당에 참가했고, 1892년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치기현 제1구에 당선, 제2대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소마 사건 뇌물 수수 의혹으로 의장 불신임안이 가결되었으나 이를 부정하고 의장석에 계속 앉아있어 중의원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다음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3][5]

무쓰와의 인연으로 대한제국 정부 법무고문과 미국 주재 공사를 역임했다. 1898년 헌정당 집권, 제1차 오쿠마 내각 출범 당시 외무대신으로 입각할 예정이었지만 오쿠마 시게노부가 반대하여 무산, 호시는 이를 비난하며 헌정당 분열을 꾀했다. 제4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대신으로 입각, 1900년 이토가 창당한 입헌정우회에 참여했다.[5][7][8]

호시는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추진, 지방 이익 확대를 유도하여 정우회 지지 기반을 넓히려 했다. 이를 위해 뇌물 수수도 많이 했다고 알려졌으며(본인은 부정), 현대 일본 금권정치의 원형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유당 내 좌파 주도 오사카 사건 이후 깡패들을 당에 입당시켜 우파 입지를 강화하려 한 점도 비판받았다.

1894년 관약 이민 폐지 즈음, 호시는 사약 이민 체제 설치를 일본 정부에 호소하여 민간 이민 회사 인가를 받았다. 이후 일본 민간 회사를 통한 알선이 이루어졌다. 당시 해외 이민과 국내 송금 업무는 요코하마 정금 은행이 독점, 호시는 5대 이민 회사(히로시마 해외 도항 회사, 모리오카 상회, 구마모토 이민 회사, 도쿄 이민 회사, 일본 이민 회사) 중 주요 몇몇 회사 사업에 관여했다.[25] 당시 호놀룰루에서 가동되던 철도를 국내에도 도입하려던 이노우에 게이지로 활동도 도왔다.[26]

호시는 해외 경험을 쌓게 하여 당의 원동력으로 삼을 목적으로 도미자 일부를 지원하고, 귀국 후에는 자유구락부원들을 정당 기관지 등의 요직이나 이민 사업 등에 중용했다. 이마미쓰 쓰루마쓰, 고바야시 세이이치로, 오쓰카 쓰네지로 등이 호시의 지원을 받았다.[37][38] 그들은 호시파 중핵을 담당하는 인재가 되었으며, 자유구락부원들 또한 대다수가 호시파에 가담하여 장사들의 정치적 지위 상승 계기가 되었다.[39]

이후 도쿄시의회 의장이 되었는데 1901년 6월 도쿄시청 참사회의실에서 비밀회의를 끝낸 뒤 시장 등과 간담을 하던 중 이바 소타로에 의해 사살당했다.[5]

2. 4. 부패 스캔들과 죽음

호시는 마이니치 신문에 의해 도쿄 시의회의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4] 그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신문의 끊임없는 비방으로 3개월 뒤 사임해야 했다. 1901년 3월,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재판 중 중년 남성에 의해 단도로 암살당했다.[3] 1901년 6월, 도쿄시의회 의장이었던 호시는 도쿄시청 참사회의실에서 비밀회의를 끝낸 뒤 시장 등과 간담을 하던 중 이바 소타로라는 인물에게 사살당했다.[5] 그의 서적들은 유족의 뜻에 따라 1913년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증여되어 '호시 문고'(星文庫)에 보관되어 있다.

3. 평가

호시 도루는 에도 쓰키지의 미장공 아들로 태어나 메이지 유신 이후 요코하마 세관장을 지냈고, 영국에서 법정 변호사(바리스타) 자격을 취득한 후 일본에서도 변호사(代言人)로 활동했다.[5]

생전에 금권과 당리당략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입헌 체제를 뿌리내리고 독립적인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옥중에서도 제본스 등의 최신 경제 서적을 원서로 읽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다.

그의 정치적 주장은 적극적 건설주의였다. 군사력 확장과 산업 발전을 통해 일본을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고, 지방의 항만, 철도, 대학 등 인프라 정비 요구를 정당이 수용하여 실현함으로써 지역에 이익 유도를 꾀하고 지지 기반과 당세를 확대하는 일본형 정당 정치의 원형을 구축했다. 그는 자유당과 정우회를 중심으로 일본의 입헌 체제 확립과 적극주의를 통한 국력 증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시 도루는 여러 의혹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5]

사건내용
거래소 설치 관련 의혹1893년 (메이지 26년), 고토 쇼지로와 함께 거래소 설치를 둘러싼 의혹 사건에 연루되어 중의원 의장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나 호시는 의장 해임 결의를 여러 차례 무시하고 등원하여 논란이 되었다.[5]
중의원 의장 불신임1893년 (메이지 26년) 11월 29일, 중의원에서 호시에 대한 의장 불신임안이 가결되었으나, 호시는 조약 개정을 지지하는 자신에 대한 경육파의 방해라며 이를 거부했다.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중의원 의장은 천황이 임명하는 칙임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호시가 의장직을 계속 수행하려 하자, 12월 13일 의원 제명이 의결되어 의원 자격을 잃고 의장에서 해임되었다.
도쿄시 의혹 사건제4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상으로 처음 입각했으나, 도쿄시 의혹 사건의 중심 인물로 지목되어 사임했다.[5][7][8]



수많은 오염 의혹으로 인해 금권 정치의 화신으로 평가받았지만, 데라우치는 "담백한 사람으로 금전에 대해서는 깨끗한 남자"라고 평했고, 나카무라 기쿠오는 "세상에 전해지는 스캔들은, 정적의 악선전이거나, 문하생이나 장사의 그것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35] 호시는 사생활에서는 검소하고 성실했으며, 여성 관계도 청렴했다고 알려져 있다. 암살 후 밝혀진 그의 유산은 1만 엔 정도의 빚뿐이었다.

한국의 법률 고문을 맡기도 했으며, 1896년 (메이지 29년)에는 주미 공사를 역임하여[5]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

'''병적인 독서벽'''을 가진 '''학자 정치인'''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해독하고 방대한 장서를 독파했다. 정치, 법률, 역사뿐만 아니라 제번스나 매클라우드 등 최첨단 경제학 서적도 읽었다.[29] 벤담공리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상보다는 구체적인 목적과 계량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33]

순수한 빈민 출신으로, 출신 배경이 좋은 지식인 엘리트에게 반감을 품고 평생 화합하지 못했다.[34] 1883년 오노 아즈사, 시마다 사부로 등 입헌개진당계 엘리트들을 위선자라고 공격했다.

3. 1. 긍정적 평가

에도 쓰키지의 미장공의 아들로 태어난 호시 도루는 메이지 유신 이후 요코하마 세관장을 지냈고, 영국에서 법정 변호사(바리스타) 자격을 취득한 후 일본에서도 변호사(代言人)로 활동했다.[5]

생전에 금권과 당리당략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입헌 체제를 뿌리내리고 독립적인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옥중에서도 제본스 등의 최신 경제 서적을 원서로 읽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다.

호시 도루의 정치적 주장은 적극적 건설주의였다. 군사력 확장과 산업 발전을 통해 일본을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고, 지방의 항만, 철도, 대학 등 인프라 정비 요구를 정당이 수용하여 실현함으로써 지역에 이익 유도를 꾀하고 지지 기반과 당세를 확대하는 일본형 정당 정치의 원형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유당과 정우회를 중심으로 일본의 입헌 체제 확립과 적극주의를 통한 국력 증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2. 부정적 평가

호시 도루는 생전에 금권 정치와 당리당략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그는 여러 의혹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5]

사건내용
거래소 설치 관련 의혹1893년 (메이지 26년), 고토 쇼지로와 함께 거래소 설치를 둘러싼 의혹 사건에 연루되어 중의원 의장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나 호시는 의장 해임 결의를 여러 차례 무시하고 등원하여 논란이 되었다.[5]
중의원 의장 불신임1893년 (메이지 26년) 11월 29일, 중의원에서 호시에 대한 의장 불신임안이 가결되었으나, 호시는 조약 개정을 지지하는 자신에 대한 경육파의 방해라며 이를 거부했다.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중의원 의장은 천황이 임명하는 칙임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호시가 의장직을 계속 수행하려 하자, 12월 13일 의원 제명이 의결되어 의원 자격을 잃고 의장에서 해임되었다.
도쿄시 의혹 사건제4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상으로 처음 입각했으나, 도쿄시 의혹 사건의 중심 인물로 지목되어 사임했다.[5][7][8]



호시는 수많은 오염 의혹으로 인해 금권 정치의 화신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데라우치는 "담백한 사람으로 금전에 대해서는 깨끗한 남자"라고 평했고, 나카무라 기쿠오는 "세상에 전해지는 스캔들은, 정적의 악선전이거나, 문하생이나 장사의 그것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35] 호시는 사생활에서는 검소하고 성실했으며, 여성 관계도 청렴했다고 알려져 있다. 암살 후 밝혀진 그의 유산은 1만 엔 정도의 빚뿐이었다고 한다.

호시는 한국의 법률 고문을 맡기도 했으며, 1896년 (메이지 29년)에는 주미 공사를 역임했다.[5] 이러한 경력은 그가 국제 정세에도 밝았음을 보여준다.

호시는 '''병적인 독서벽'''을 가진 '''학자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해독하고 방대한 장서를 독파했다. 정치, 법률, 역사뿐만 아니라 제번스나 매클라우드 등 최첨단 경제학 서적도 읽었다.[29] 벤담공리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상보다는 구체적인 목적과 계량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33]

호시는 순수한 빈민 출신으로, 출신 배경이 좋은 지식인 엘리트에게 반감을 품고 평생 화합하지 못했다.[34] 1883년 오노 아즈사, 시마다 사부로 등 입헌개진당계 엘리트들을 위선자라고 공격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4. 기타


  • 가나가와현에서 일할 당시 오사카에서 온 서생들과 함께 지내며 술을 마시고 난폭한 행동을 하여 순경과 자주 싸웠다. 대장성에서 근무하던 메이지 5년(1872년) 6월에는 인력거꾼을 때리고 순경에게 난폭하게 굴어 100일간 자택 근신 처분을 받았고, 8월에는 대장성에서 해고되었다. 무쓰 무네미쓰는 생활 개선을 위해 자신의 집으로 이사할 것을 권유했고, 호시는 서생들 때문에 거절했지만 무쓰는 서생들도 함께 와도 좋다고 하여 "식객의 식객"이라는 유례없는 형태로 무쓰의 집으로 이사했다.[27]
  • 요코하마 세관 시절, 외교 특권을 내세워 짐 검사를 강요한 러시아 제국 임시 공사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당신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지정된 부두 외에서 승하선하려는 외국인에 대해서도 밀수를 막기 위해 엄중한 단속을 실시했다.[28]
  • 1874년 5월의 '''여왕 사건'''[13] - 호시가 영국 영사에게 보낸 영문 서한 중 Her Majesty's Court를 번역문에서 "여왕 폐하의 재판청"이라고 표기한 것에 대해, 로버트슨 영사가 "여제"가 아닌 "여왕 폐하"라고 표기한 것은 불경하다고 트집을 잡았다. 호시는 영국에서 Empress가 아닌 Queen을 칭하고 있으니 "여왕 폐하"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고, 다음 해 6월 영국 공사 파크스가 외무성에 쳐들어가 호시의 면직과 사죄를 강요했다. 영국을 두려워한 정부는 공문서에 외국 군주의 공식 명칭은 모두 "황제 폐하"로 표기하기로 하고(메이지 7년 태정관 포고 98호), 호시에게는 속죄금 2JPY을 부과하고 요코하마 세관장을 면직시켜 사건을 종결시켰다.
  • 1893년 11월 29일, 중의원에서는 당시 원 의장이었던 호시에 대한 의장 불신임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호시는 "조약 개정을 지지하는 자신에 대한 경육파(국민협회·입헌개진당 등)의 방해로 부끄러운 점은 없다"고 하며 거부했다. 대일본제국 헌법 하의 의원법에서는 중의원 의장은 칙임관으로 취급되므로 임면권은 천황에게 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호시의 해임을 요구하는 상주안을 가결했다. 이에 대해 천황은 "의원 스스로 불명확했던 과실"이라는 칙답을 내려 중의원의 태만을 질책했다. 이후 호시가 의장석에 착석하여 직무를 계속하려는 자세를 보이자, 12월 5일에는 호시의 등원 정지 1주일의 징벌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등원 정지가 끝난 12월 12일에 호시가 다시 의장석에 앉으려 하자, 12월 13일에 의원 제명이 의결되었기 때문에, 호시는 중의원 의원 자격을 잃고 자동적으로 의장에서 해임되었다.
  • '''병적인 독서벽'''·'''학자 정치인''' -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해독하고, 방대한 장서를 독파했다. 정치, 법률, 역사 외에도 제번스나 매클라우드 등 최첨단 경제학 서적도 읽었다. 요코하마 세관 시대에는 칸나와 치토키, 노자와 케이이치 등과 윌리엄 블랙스톤의 "''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를 『영국 법률 전서』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원본은 축약본인 ''The Student's Blackstone'').[29] 오카자키 쿠니스케에 따르면, 호시는 독서를 하고 싶어서 시간을 아끼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싫어하며, 별다른 용무도 없는 방문자를 싫어하고 거절했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고, 오만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30] 장서는 1만 1천 권에 달했고, 사후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도서관에 기탁되었다.[30] 주미 공사 시대에도 많은 도서를 수집했는데, 병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재 무관이었던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호시의 서재에서 마음대로 책을 꺼내 읽었다고 한다.[31]
  • '''무쓰 무네미쓰와의 관계''' - 하라 타카시처럼 무쓰를 존경하지는 않았지만 은혜를 느끼고, 우직하게 대했다. 자유당 입당은 변호사로서 성공했던 당시 호시에게 적극적인 동기는 없었고, 옥중에 있던 무쓰의 출옥 후 기반 다지기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출옥 후 외유한 무쓰를 뒤로하고 사재를 털어, 이타가키의 제멋대로 함을 견디며, 자유당을 유지한 것도 무쓰의 선택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1886년 2월, 귀국한 무쓰가 10월에 정부의 무임소 변리 공사가 되었을 때는 실망하고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무쓰는 호시를 차갑게 내쳤지만, 섭섭함이 남아 제3 의회에 이르러 의장으로는 코노 히로나카가 유망시되었지만, 무쓰의 뜻을 헤아린 오카자키 쿠니스케의 노력으로 호시의 중의원 의장이 실현되었다. 호시는 무쓰의 지시도 받아, 마쓰카타 내각과 격렬하게 대립, 내각 탄핵 결의안을 가결, 군함 건조비 등 새로운 사업비는 전액 삭제되었고, 마쓰카타 내각은 붕괴되었다. 다음으로 무쓰가 외상으로 입각한 제2차 이토 내각에 대해서는 자유당 내부를 강제로 방향 전환시켜, "화협의 조칙"의 수락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호시는 자유당 내뿐만 아니라 개진당이나 관리당으로부터의 증오를 한몸에 받아 중의원 의장 사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무쓰 사후의 호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자체를 목표로 삼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32] 도쿠토미 소호는 호시를 무쓰 문하로 하여, "호랑이 같은 호시 토루도 무쓰 앞에서는 거의 고양이 같았다"라고 하고 있다.
  • '''벤담에 대하여''' - 영국 체류 중 벤담의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 of Moral and Legislation''"(1789년 "도덕 및 입법의 제원리 서설")을 반복 숙독했다. 이상에 헌신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목적에 유효한지 여부, 또한 계량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는 호시의 태도에서 벤담의 영향을 볼 수 있다. 1877-1878년, 무쓰 무네미쓰, 시마다 사부로 (벤담 『입법론강』의 번역자) 등과 영서의 회독을 했다. 시마다에 따르면, 어느 날 무쓰로부터 "인간의 시비의 귀착점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이 발해졌고, 호시는 벤담의 공리주의에 입각한 법률적 견지에서 논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별다른 행동도 하지 못하고 관헌의 탄압을 받는 자유당의 장사들에게 깊이 동정했고, 1884년에 급진파의 기수인 스즈키 샤테이가 29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을 때, 호시는 연신 애석해하며, "사람은 헛되이 살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슬퍼했고, 문하생인 노자와로부터 평소 주장하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다르지 않느냐고 지적받자, "옛날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라고 답했다고 한다.[33]
  • '''반 엘리트''' - 순수한 빈민 출신이며, 출신에 혜택받은 지적 엘리트에게 반감을 품고, 평생 화합하지 못했다. 런던의 미들 템플 법학원에서 동창이었던 바바 타츠이는 도사번상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번비 유학생이었지만, 한 번의 논쟁 끝에 싸움으로 끝나고, 그 이후 교제는 없었다고 한다. 1883년 개진당 공격에 가담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개진당을 위선자라고 불렀던 것도, 오노 아즈사, 시마다 사부로를 비롯한 순경을 걸어온 지적 엘리트에 대한 증오, 엘리트 집단이면서 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것에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34]
  • '''호시 토루의 동상''' - 묘소가 있는 이케가미 혼몬지 경내에는 호시의 동상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금속 공출 때문에, 받침대를 남기고 철거되었다. 전후, 유족에 의해 받침대는 기증되었지만, 현재는 니치렌 상이 놓여 있다.
  • 수많은 오염 의혹으로 당시부터 금권 정치의 화신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사생활에서는 검소하고 성실했다고 한다. 후임의 데라우치도 "담백한 사람으로 금전에 대해서는 깨끗한 남자"라고 평했고, 또한, 나카무라 기쿠오에 따르면 "세상에 전해지는 스캔들은, 정적의 악선전이거나, 문하생이나 장사의 그것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35] 호시의 생존 중은 물론이고 현대의 정치인도 첩을 갖는 것은 드물지 않지만, 여성 관계의 청렴함은 호시를 비난하는 측에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서생을 포함한 집안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갖고 대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자산 형성에 관해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암살 후에 밝혀진 호시의 유산은 10000JPY 정도의 빚뿐이었다고 한다.
  • '''지명''' -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호시가오카의 지명은 호시에서 유래되었으며, 쇼와 40년에 제정되었다.[36]

참조

[1] 서적 Japanese Legal System Cavendish Publishing
[2] 서적 Political History of Japan During the Meiji Era, 1867-1912 Routledge
[3] 서적 A History of Japanese Journalism: Japan's Press Club as the Last Obstacle to a Mature Press Psychology Press
[4] 서적 The Hatoyama Dynasty: Japanese Political Leadership Through the Generations Palgrave Macmillan
[5] 문서 松尾章一「星亨」『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小学館及び「星亨」『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Britannica Japan https://kotobank.jp/[...]
[6] 문서 『新訂 政治家人名事典 明治~昭和』
[7] 문서 『新訂 政治家人名事典 明治~昭和』
[8] 뉴스 星逓相辞職を強要せらる https://dl.ndl.go.jp[...] 明治編年史編纂会 1900-12-17
[9] 서적 明治の事件史―日本人の本当の姿が見えてくる! 青春出版社
[10] 간행물 横浜開港場における英語教育−ヘボンを介して開設した『横浜英学所』 神奈川県立図書館 2017-03
[11] 간행물 星亨 英学と近代主義 2005-07
[12] 문서 和歌山県貫属星亨租税寮七等出仕被命ノ件 国立公文書館 1872-09
[13] 문서 横浜税関長租税権助星亨英国領事ニ贈書中女王ノ文字ヲ記載セル罪ヲ贖フ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 1874-06-28
[14] 서적 Men-at-the-bar: A Biographical Hand-list of the Members of the Various Inns of Court, Including Her Majesty's Judges, Etc. (2nd ed.) Printed for the author
[15] 간행물 自由黨福島事件と高等法院 慶応義塾大学法学研究会 1959
[16] 문서 『新聞集成明治編年史』第6巻 https://dl.ndl.go.jp[...]
[17] 뉴스 星亨帰朝す https://dl.ndl.go.jp[...] 『新聞集成明治編年史』第7巻 1890-10-09
[18] 문서 衆議院議員総選挙一覧 https://www.ndl.go.j[...] 1912-02
[19] 서적 前掲書
[20] 뉴스 星亨朝鮮法務顧問となる https://dl.ndl.go.jp[...] 『新聞集成明治編年史』第9巻 1895-04-14
[21] 문서 星亨 https://www.weblio.j[...] 江戸人物事典
[22] 서적 前掲書
[23] 웹사이트 王仁三郎の予言 http://onisaburo.com[...] 愛善苑 岡山分所 2023-07-03
[24] 문서 慶応義塾大学三田メディアセンター https://www.lib.keio[...]
[25] 문서 自叙伝 波乱重畳の七十年(抄)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電子展示会「ブラジル移民の100年」
[26] 학술지 移民の魁・星名謙一郎のハワイ時代後期 : ワイアルア耕地監督・新婚の頃 https://ouc.repo.nii[...] 大阪商業大学商経学会 2014-02
[27] 서적 星亨
[28] 서적 星亨
[29] 서적 星亨とその時代
[30] 서적 星亨傳
[31] 서적 星亨
[32] 서적 星亨
[33] 서적 星亨
[34] 서적 星亨
[35] 서적 前掲書
[36] 웹사이트 研究誌「市政研究うつのみや」 https://www.city.uts[...] 宇都宮市役所 2024-10-03
[37] 문서 「移民界の活動者」〜移民の散布地図 https://www.ndl.go.j[...]
[38] 뉴스 「鬼怒川水電を倒せ」 東京毎日新聞 1912-12-02
[39] 간행물 官民調和への移行と院外者―20世紀転換期における自由党系青年運動を通して https://www.ritsumei[...] 立命館大学人文科学研究所 2019
[40] 문서 太政官日誌 明治七年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1874
[41]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0-11-12
[42]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1-06-23
[43] 서적 The Student's Black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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